2023 종이와 비단
류 철 하(전시기획자)
종이와 비단은 동아시아 문명과 문화의 빛을 세계에 전해 주었던 매우 상징적인 재료이다. 종이의 발명 이후 지식세계의 전달과 교류, 문명의 발전이라는 정보혁명 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는 시와 회화라는 예술의 상상력을 종이 위에서 펼쳐 보임으로써 한 단계 상승되었다.
또한 비단은 복식문화와 함께 성장하여 ‘비단길’로 지칭되는 동서교류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단은 불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중세 문명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회화 장르의 재료로서 오늘도 굳건히 보존되고 있다. 1072년에 그려진 곽희의 <조춘도早春圖>는 막 피어오르는 봄의 생기를 담은 북송(北宋)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대만 고궁박물원 전시실에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천년을 넘는 의미와 상징, 무한한 해석이 곽희의 비단 그림 앞에 전개되어 있다.
신라시대 저지(닥나무종이)로 알려지고, 고려시대 중국 묵객들의 사랑을 받은 고려지, 즉 고려종이는 다듬이질이 잘되어 “섬유질이 희고, 고르고, 질겼으며, 종이의 질이 누에고치처럼 부드럽고 깨끗해서” 중국에 수출되어 각별히 사랑받았다.
현재에 이르러 종이(한지)는 루브르박물관 등 세계박물관 기록유산과 유물보존의 특별한 재료일 뿐만 아니라 상하이국제종이비엔날레 등 종이의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공통 상징이자 시도로 자리하고 있다.
<종이와 비단>이라는 제목을 달고 실제 종이와 비단에, 동양적인 재료와 기법으로 작업을 하는 네 명의 여성 작가들(김도영, 김은희, 성민우, 임서령)이 있다. 미술은 물질적인 재료와 표현법에 기반한 창작이기에 종이와 비단이라는 전통적인 재료는 ‘과감한 형식파괴와 새로움’이라는 현대미술의 개념에는 맞지 않는 재료인 것은 분명하다. 한자(漢字)라는 고전형식을 해체하고 그 자신의 문자로 새롭게 추상화한 이응노 작업의 선례에 비추어 보면, 분명 종이의 본질적인 형태에 기반한, 비단의 순전(純全)한 형식을 녹인 회화작업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다.
그러나 종이와 비단이라는 재료 자체의 문제 보다는, 재료가 가진 수용성, 즉 ‘흡수하고, 적응하며, 동화하는 수용성의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겹겹이 쌓아가는, ‘맑고 고요하며, 직관하는 세계에 대한 정적’을 어떻게 대상에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회화적 시선이 가닿는, ‘불완전하고 연속적이지 않는 표면에서 발산하는 색의 진동’과는 다르게, 한 세계를 온전히 감싼 빈틈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논리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 문화에 내재한 전통적인 색이 있다. 우리의 주거 환경과 풍토, 무한한 시공간에서 느낀 이 색들은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 뿐만 아니라 흑과 백을 포함한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색들이 모인 세계이다. 우리말의 형용사처럼 매우 분별적이고 불가사의한 색들이 파스텔처럼 분열된 자연색의 세계를 예민하게 고정된 어떤 감각으로 표현한 것, 이것이 감각적 수용성으로서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는 일상이 녹아있는 서사이기 보다는 순간으로 모든 세계를 압축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투명하게 보여주어야 하는 세계이므로 거의 시(詩)에 가까운 세계이다. 동양회화는 시간의 서사가 잠시 유보된, 직관이 작동하는 영역이기에 색은 매우 예민한 겹으로 쌓인다. 종이와 비단은 이 예민한 겹을 위해 화면 뒤에서 색이 스며들게 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 서서히 안착하는 미묘한 깊이에 의해 조정된다. 물성과 물질에 대한 역설적인 방법론, 이것이 전통회화의 인식과 소통방법이다.
네 명(김도영, 김은희, 성민우, 임서령)의 여성작가들은 동양회화의 역사와 전통 안에서도 현대적이고 분별적인 감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비단 하나에도 수백 가지의 다른 전통색이 나오듯이 종이와 비단은 전통재료를 넘어 보다 미래적인 가능성을 탐구하는 질료이자 영감, 그리고 회화주제 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인 것이다.
김도영은 한옥을 하나의 작은 우주로 보고, 자연과 사람을 매개한 간결함, 곧 한옥이 가진 미와 덕을 표현한다. 한옥은 텅 비어 있으나 충만하고, 별과 달이 마당에 내려앉아 있거나, 담장이 집과 사립문을 안고 있는, 문학적 풍류가 가득한 공간이다. 경쾌한 색감으로 표현된 한옥은 모든 세부 사물이 정돈된 민화 같은 단순함으로 표현된다. 짧은 선들이 중첩된 중복되고 안정적인 붓질은 화면의 밀도를 정연하게 만든다.
김은희는 석채가 주는 감각적인 강렬함과 색감, 그리고 자연을 닮은 단순한 형태, 대지로부터 연속적으로 생성되는 듯한 표현 등 매우 독특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연속적으로 이어진 선들과 점들은 고대 암각화의 생명순환을 연상하게 만든다. 붉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생성되는 서로 닮은 세계의 연결, 생명의 원초적 힘인 태양빛으로 인해 생성되는 세계의 연속 등이 천연의 온갖 만물을 낳고 있다.
성민우는 풀을 통해 생명의 성장과 번식, 그리고 죽음의 몸에 대한 사유를 지속해 오고 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풀은 수묵과 채색, 금분으로 가득 채워진 생명찬가로 바뀌어 진다. 풀은 자연과 식물, 그리고 인간생활에 대한 추체험이라는 비유이다. 성민우가 묘사한 풀은 개별 이야기가 확장된 존재 세계에 대한 묘사로 더욱 증폭된다. 풀에 대한 묘사력이 더욱 진전되어 이질적이고 낮선 어떤 세계가 형성되고 있다.
임서령의 인물화는 간결하고 여린 필선으로 대상을 정확하고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엄격함과는 달리 화면 전체에서 보이는 색감은 탈색된 듯 낮은 채도를 유지하고 있다. 인물과 대상의 급격한 공간구조, 정적인 인물의 투명한 표현, 사색적인 그리고 문학적인 함축 속에서의 공간의 긴장 등은 부수요소가 없어진 현대라는 접점에서 새로운 상상의 힘이 된다.